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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공부/100일 글쓰기

[79일][8월4일] <글쓰기의 최전선> 발췌

<글쓰기의 최전선> 발췌

 

집안이나 조직에서 소통에 애를 먹었다. 가령, 내 말은 시어머니가 듣고 싶은 말로 접수되면서 의미가 변질되었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합리적 인식이 아니라 자신의 정서로 판단했다. (p.8)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 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 혼란스러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지, 덮어두거나 제거하는 일이 아님을 말이다. (p.9)

 

일상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그런 기회는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글쓰기라는 장치를 통해서 나를 세속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는 것들과 잠시나마 결별할 수 있으니, 관성적 생활 패턴에서 한 발 물러서는 기회만으로도 글 쓰는 시간을 소중하다. (p.10)

 

실패는 삶에서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거해주었습니다. 저는 실패한 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저의 모든 열정을 가장 소중한 한 가지 일에 쏟아 붓게 되었습니다. 두려워했던 실패를 경험했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 (p.13)

 

분노, 좌절, 실망, 고통 같은 내 몸을 밟고 지나가는 감정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p.14)

 

인터넷 포털 화면을 켜면 쏟아지는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 동향과 지하철 광고판의 현란한 문구들과 TV에서 무작위로 유포하는 자막들은 유혹한다. 그것은 하나같이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삶, 경쟁과 출세와 소비를 촉구하고 재생산하는 집요한 언어였다. 삶의 가치라는 고귀한 물음을 봉쇄하고 주변에 있는 타인의 삶에 등 돌리게 하는 쓸쓸한 말들이었다.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에 대한 통념과 상식은 남들이 만들어낸 언어로 구성되었다.(중략)그러니까 세상을 바꿔야 할 이유가 없는 자들의 언어로는 이 세상의 모순과 불행을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p.15~16)

 

산다는 것은 언어를 갖는 일이며 언어는 존재의 집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기억했다. (p.16)

 

밤이고 낮이고 온 국토를 삽질하는 게 발전은 아니듯 자신을 속이는 글, 본성을 억압하는 글, 약한 것을 무시하는 글, 진실한 가치를 낳지 못하는 글은 열심히 쓸수록 위험하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p.22)

 

<글쓰기의 최전선>은 목적에 갇히지 않는 글쓰기 수업이었다. 자기 삶을 자기 시대 안에서 읽어내고 사유하고 시도하는 삶의 방편이자 기예로서 글쓰기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표방했다. (p.31)

 

사회구조적인 매트릭스에서 자신을 분리시킨 채 성급한 반성과 화해, 자기 정당성 확보의 글쓰기로 잠시 위안 받고 산뜻하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그 삶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조금씩 불편해지며 깨어있는 게 목표라면 목표였다. (p.31)

 

다만 잘 쓴 글이든, 미완의 글이든, 숨겨둔 글이든, 파일로 저장하지 않고 날리는 글이든, 그런 과정 하나하나가 자기 생각을 정립하고 문체를 형성하는 노릇이며 삶의 미학을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못 써도 쓰려고 노력하는 동안 나를 붙들고 늘어진 시간은 글을 쓴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기 한계와 욕망을 마주하는 계기이자 내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타인과 인사하는 시간이라고. 이제는 나부터 안달과 자책을 내려놓고 빈 말이 아닌 채로 학인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 어떤 글도 무의미하지 않다고, 우리 어서 쓰자고. (p.35)

 

직업적 글쓰기와 본래적 글쓰기의 두 트랙을 오가며 허둥지둥 달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하나로 합쳐지는 선순환 구조에 들어와 있었다. (p.41~42)

 

자기 이해를 전문가에게 의탁하기보다 스스로 성찰하고 풀어가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며 그중 가장 손쉬운 하나가 내 생각에는 글쓰기다. 글쓰기는 삶을 이해하기 위한 수공업으로, 부단한 연마가 필요하다. (p.43)

 

글 쓰는 일이 작가나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소수의 권력이 아니라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이 선택하는 최소한의 권리이길 바란다. (p.44)

 

다른 생활 습관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인간 본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구경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학교를 모르겠다. - 몽테뉴 (p.45)

 

열 편 남짓 글을 쓰고 나서 예외 없이 글감의 고갈에 직면하는 이유는 삶 혹은 나에 대한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어쩌면 글감의 빈곤은 존재의 빈곤이고, 존재의 빈곤은 존재의 외면일지 모른다. (p.52)

 

글쓰기는 의 한계를 흔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은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의 지루한 반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자아냈던 대소사의 나열은 삶의 극히 일부분이다. ‘의 범위 역시 피와 살이 도는 육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신의 총체이기도 하며 관계의 총합이기도 하다. 나는 나 아닌 것들로 구성된다. 내가 쓰는 언어를 보자. 그간 읽었던 책, 접했던 언론, 삶았던 가족, 만났던 애인, 놀았던 친구의 말의 총합이다. (p.53)

 

한 개인의 사생활도 어떤 사람, 어떤 사물, 어떤 장소에 대한 기억이다. 남의 경험이 내 경험에 들어 있듯, 내 경험도 남의 경험에 연루되어 있다. 글쓰기에서 공과 사라는 영역은 그렇게 서로 유동하고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삶이란 타자에게 빚진 삶의 줄임말이고, 나의 경험이란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의 합작품인 것이다. 누구도 삶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과 경험의 코뮨적 구성 원리를 인식한다면, ‘경험의 고갈이라는 난감한 사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p.54)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부족해(보여)도 지금 자기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실패하면서 조금씩 나아진다는 점에서 나는 글쓰기가 좋다. 쓰면서 실망하고 그래도 다시 쓰는 그 부단한 과정은 사는 것과 꼭 닮았다. (p.58)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 이성복 (p.59)

 

고통이란 원래 사회적 의미망에서 생겨난다. 타인의 시선이 감옥이 되어버린 상태인 것이다. (p.60)

 

선악구도를 넘어서는 지점을 찾아보려는 노력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싹튼다. 그게 어렵지만 먼저 느낀 대로 말하고 쓰고, 그 생각을 공적인 장에 내놓아 외부에서 검증받고 소통하면서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나가는 것. 그러니까 다른 (생각을 가진) 내가 되어가는 과정의 기록이 글쓰기의 본령이다. (p.61)

 

좋은 글이 나오려면, 타인에게 비친 나라는 자아의 환영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자기검열, 사회적 검열에 걸려 넘어지면 글을 쓰기 어렵다. 대개는 자기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로 남을 대한다. 만약 누군가 자기 과거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유사한 삶의 경험치를 가진 타인을 동정과 수치로 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는 과정은 자기의 편견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p.62)

 

인생이라는 책에서 한 페이지만 찢어낼 수 없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품고 가야 하는 것. 아픈 채로, 불편한 대로 안고 같이 살아갈 힘이 길러졌다. (p.75)

 

꼭 대형마트 계산대이거나 먼지 휘날리는 작업장이거나 밀양 송전탑 반대 현장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는 존재 물음 과정에서 이른 곳이라면, 현실의 베일이 벗겨지는 곳이라면, 삶의 의미를 정의 내리게 되는 곳이라면, 거기가 바로 삶의 최전선이다. (,p.78)

 

우리는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아주 깊이 상처를 남기는 책이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느껴지고,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숲으로 추방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자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 있는 바다를 내려치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 카프카 (p.83)

 

나는 학인들에게 책을 읽되 진실한 독해를 당부했다. 여기서 진실함이란 사실에 부합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부합하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저자의 의도에 맞추려 낑낑대지 말고 자기 삶의 구체적인 정황을 떠올리고 접목시키면서 주관적으로 읽어달라고 했다.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모양이다. 지식 따로 생활 따로의 교육 풍토 탓일 게다. (p.84)

 

지식은 단순화, 맥락화 작업의 산물이고 삶은 고도의 복잡성, 우연성의 산물이니까. (p.84)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한된 삶의 조건에서 한정된 독서를 한다. 만나는 사람을 계속 만나듯이 읽던 책들을 주로 읽는다. 그간 읽어왔던 이물감 없이 술술 책장이 넘어가는 책들 위주로 본다. 그것이 참다운 독서일까. 앞서 카프카가 말한 내면의 얼음 바다를 더 단단히 만드는 책 읽기. 자아가 유연해지기보다 고집스러워질 가능성이 많지 않은가. 그건 약일까 독일까. (p.86)

 

그간 내륙지방에 고립되어 있어서 몰랐는데 20년 만에 바다에 나가보니 내가 물과 친하고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나를 열어두고 나를 실험하면 또 다른 나를 발견할 기회가 주어진다. (p.87)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고, 시는 패배자의 기록이라는 이장욱 시인의 말을 알 것도 같다. 승리자의 메시지만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세상에서 마음 붙일 곳 없던 영혼들이 패배자가 지은 말들의 풍경에 기대어 한 세상 숨 돌리고 간 것일 게다. (p.92)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p.95)

 

한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으로 맞춰지면서 본성은 찌그러지고 감각은 조야해진다. (p.95) (조야하다 : 천하고 상스럽다. 물건 따위가 거칠고 막되다. )

 

니체는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을 수 없다며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p.96)

 

조직에 매인 동안 이렇게 느낌을 봉인한다면, 분노의 감각을 소거한다면 훗날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는 속도로 내 느낌의 침몰을 자각하는 와중에 무슨 계시처럼 김수영이 떠올랐다. ‘제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없는가자문자답했던 시인. (p.99)

 

어쨌거나 느낌을 말하기는 꽤나 어색하다. 느끼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지만 느낌을 말하고 나누는 기회는 드물다. (p.101)

 

우리는 안다는 것보다 느낀다는 것에 굶주린 존재인지 모른다. (p.102)

 

사람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자신은 모릅니다. 알고 있었다고 믿었는데 모르고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데 모르고 있다고 믿었는데 실은 알고 있는 것도 있거든요. 이 영역이 제가 글을 쓰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 후루이 요시키치 (p.103)

 

취향을 만드는 일은 탈취향을 향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p.105)

 

알아야만 하는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호기심말이다. (p.105)

 

문화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의 발견, 감정의 세분화, 다름의 향유다. 모든 감정의 평준화를 양산하는 건 결코 좋은 문화가 아니다. (p.106)

 

고유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때 사회적 서정이 높아지고, 타자를 이해하는 감수성이 길러지지 않을까. 그러면 온갖 끔찍하고 야만적인 갑질 사건이 잦아드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p.107)

 

파국과 혼돈을 초래할 위험을 무릅쓴 진실 말하기. 당장은 불쾌하고 불편해도 적절한 자극이 없으면 자기 글을 냉철하게 볼 수 없다. (p.109)

 

나는 이것을 역지사지의 신체 변용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 몸을 들여놓아보는 상상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작은 관점 하나 바꾸기도 얼마나 어려운가. 관성적 사고와 법칙에서 벗어나 자기 갱신을 촉구하는 어떤 강력한 긴장이 합평 시간에 자연스레 조성된다. (p.111)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 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체가 될 일도 없다. (p.115)

 

사람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제도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축적된 정보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만드는 토대가 된다. 슬프게도 한 인간의 우주가 미디어를 통해 완성된다. 그래서 우리가 도덕, 상식, 통념이라고 부르는 가치 체계는 워낙 당대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글을 쓸 때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 어떻게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 알려고 해야 한다. (p.116)

 

모든 글()의 최종 목적은 감동이다. 그리고 진정한 감동은 신체가 바뀌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다. (p.119)

 

누구나 자기 렌즈로 세상을 본다. 눈물이라는 렌즈로 보아야 타인의 눈물이 보인다. 내가 외로워야 남의 외로움도 눈에 든다. 언젠가 나는 길 가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다. 남들이 나를 보는 것 같아 창피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전화를 끊을 수도 없었다. 그 뒤로 길가에서 눈물지으며 통화하는 사람들이 가끔 보인다. 기형도의 시구대로 기억할만한 지나침인 것이다. (p.123)

 

무엇을 경험하느냐가 아니라 경험한 것을 통해 무엇을 느끼느냐이다. (p.128)

 

글쓰기 전에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글을 쓰기 전에 스스로에게 중얼중얼 설명하면서 자기부터 설득하는 오붓한 시간을 갖자. (p.129)

 

글쓰기는 둥그스름한 돌에서 모난 돌로 자신을 깎고 벼리는 일이다. 더 섬세하고 더 고유하게 감각을 다듬어야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단지 해묵은 것을 새롭게 보는 시각이 있을 뿐이다. (p.132)

 

할 말이 분명하고 확신에 차서 써도 쓰다 보면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 십상인 게 글이다. 지도가 있어도 길을 헤매는 것처럼. 글에는 적어도 세 가지 중 하나는 담겨야 한다. 인식적 가치, 정서적 가치, 미적 가치. 곧 새로운 지식을 주거나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거나 감정을 건드리거나. (p.135)

 

사는 이유가 별거 없듯 대수롭지 않는 소소한 이유이다. 그런데 그 별거 없는 삶, 시시한 욕망을 밀도 있게 찬찬히 담아내면 특별한 글, 진솔한 글이 된다. (p.136)

 

좋은 글에는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 있다. 나는 왜 언제부터 그 일을 알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갖게 되었는지, 일을 하는 동력은 무엇인지, 일에 대한 환상이 어떤 지점에서 깨졌는지, 이 일을 계속 할지 말지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 어떤 느낌,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그것을 당연시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더 깊고 진지하게 파고드는 작업, 그게 문제 의식이다. 우선은 나를 향해 라고 질문하는 것 말이다. (p.136)

 

일상의 풍경과 생각과 느낌이 볕처럼 은은히 차오른 글은 구체적인 한 사람을 선명히 보여준다. 그럴 때 그 글이 다른 이의 경험이나 감정과 겹치고 공감을 낳는다. 의 글에서 억눌러놓은 를 보았을 때, 미처 몰랐던 자기의 욕망을 알아차렸을 때, 사람들은 그 글을 좋은 글이라고 느낀다. (p.137)

 

문제의식이란 거창하지도 까다롭지도 않다.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 (p.137)

 

가슴에 물음표가 많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이 많다. 작은 자극에도 촉발을 받고 영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물음표가 어느 순간 느낌표로 변하고 다른 삶의 국면을 통과하면 그 느낌표는 또 다시 물음표가 된다. 내가 이렇게 믿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닌가 보다, 하는 생각이 찾아드는 것이다. 그 물음표와 느낌표의 반복과 순환이 자기만의 사유를 낳는다. (p.138)

 

나는 격류 옆에 있는 난간이다. 누구든 잡을 수만 있다면 나를 잡아도 좋다! 그러나 나 너희들을 위한 지팡이는 아니다” - 니체 (p.142)

 

복잡한 문장과 마찬가지로 앙상한 문장도 메시지 수용에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 (p.152)

 

사유가 촘촘해서 문장이 흐름을 타고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건드리며 인식의 틀을 흔들어놓는 글. 하나의 메시지나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어라도 남으면 그건 좋은 글이다. 그럼에도 자기만의 글쓰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는 단문 쓰기가 글쓰기를 여는 문이다. (p.153)

 

글쓰기는 파편처럼 흩어진 정보와 감정에 일종의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주제를 부각하는 행위다. (중략)나의 경험의 의미는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글 쓰는 과정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p.159)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내러티브 제1원칙에 해당하는 말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갈 수 있는 좋은 팁이다. (p.162)

 

나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못 쓸 수도 없다는 말은 희망적이다. 적어도 뿌린 대로 거둘 수 있다는 게 아닌가. 살아가면서 투입 대비 산출이 정확한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예전에 아는 사진작가가 백 장 찍으면 좋은 사진 한 장 건질 수 있다고 했는데, 글도 열 번쯤 고쳐본다면 좋은 글이 건져질 것이다. 글쓰기에 요행은 없다. 요행처럼 보이는 일이 있을 뿐. (p.172)

 

매일 개미처럼 쓸고 닦았던 친정 엄마도 생각났다. 그때는 몰랐다. 엄마의 노동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편했다면 남이 힘들었단 뜻인데 몰랐다. (p.173)

 

글을 보면 삶이 보인다. 글에도 인격이 있다. (p.175)

 

마치 영어처럼 글쓰기도 스펙 쌓기의 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글쓰기는 꼭 필요하다는 확고한 믿음. ‘가 없는 자기계발 담론을 내면화한 학인을 마주하는 일은 더러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p179)

 

나는 이 세계가 앓는 질병의 징후라고 말한 니체의 진단대로, 각자 개인적인 체험을 구체적으로 쓰다 보면 어떤 구조적 모순이 드러나게 마련이고 그 작업을 같이 해보고 싶었다. 생활 르포. 일상 말하기이면서 진실 말하기. (p.181)

 

조지 오웰은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의 주제, 곧 마땅히 표현해야 될 바를 표현하는 일인데 그건 경험하지 않으면 실상을 드러낼 수 없다고 단언했다. (p.183)

 

무시는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없는 듯이 취급한다. 이 가려진 부분,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게 글 쓰는 이의 역할이다. (p.185)

 

인간은 서로의 도움 없이 삶을 지탱할 수 없으며 정신을 배양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터뷰 경험은 소중하다. (p.187)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p.189)

 

삶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 안도현 (p.191)

 

인터뷰가 연애와 비슷한 거다. 이심전심 오래된 연인들의 연애가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을 온갖 상징과 기호로 읽어내는, 시작되는 연인들의 연애. (p.196)

 

한 사람의 모든 게 정보적 가치를 지닌다는 게 아니라, 인터뷰는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삶아 세계를 읽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눈이 내려서 나타샤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푹푹 날리는 것처럼, 우주만물의 운행 질서가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재구성되는 것이 인터뷰다. (p.197)

 

(원고지 71.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