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시간에 서점 귀퉁이에서 읽은 허지웅 에세이는 꽤 매력적이었다. 칭송되는 김난도 교수의 말을 기분나쁘지 않게 반박했고 책 열권이 몸에 밖히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이외수 작가와 일맥하는 문장 예찬도 있었다. 그래서 단박에 주문해 읽게된 책.
첫번째 꼭지는 '나는 별일 없이 잘 산다'이다. 엄마의 전화를 받고 삼촌 집에 간 소년 허지웅은 엄마가 뺨을 맞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격분의 복수라도 해야 할 순간, 그는 착하고 예의바른 소년이 됐다. 그리고 줄곧 그 때를 변명하기 위해 살고 있다고 말한다. 장기하가 통기타치며 노래해야 할 것 같은 제목 안에는 인간 허지웅의 삶의 방향성이 녹아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꼭지는 글쟁이로서의 그의 센스를 감지하게 한다. 영화로 단련된 그는 분명 흥행과 성공의 문화적 코드도 알고 있을 터. 듣기만 해도 눈물나는 엄마라는 존재가 뺨을 맞는 걸 본 아들의 마음이란? 그 자리에서 웃으며 인사했던 본인을 되돌아보는 현재 심경은? 헤아린다는 말조차 불가능한 질문들이 머리 속을 멤돌게하는 이 에피소드는 <버티는 삶에 관하여>를 끝까지 들고 있게 하는 힘이 된다. 그리고 책을 내는 작가로서의 허지웅의 여우같은 전략도 엿볼 수 있다.
책 구석구석에는 <마녀사냥>에서 보여지는 허지웅의 대담함이 느껴진다. 체면을 잃을까 차마 입 밖에 내지 않는, 그러나 일상적인 소재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부분들이 꽤 있다. 포경수술시 상당량의 성감대가 잘려나간다는 사실을 접한 후 국위 선양이 절대 불가하다는 걸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그는 말한다. 포경수술을 하지 않은 친구가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고. 얼룩진 역사만큼 왜곡된 정보로 이뤄졌던 포경수술과 이에 대한 그의 격분을 담은 이 웃픈 에피소드의 제목은 '포경수술의 음모'다.
단 하나의 처세라는 '버티기'를 주장하는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의 삶, 그가 본 세상, 그가 본 영화 이야기다. 빵 터지는 유머와 '이런 생각도 하는 사람이었어?' 싶은 정치적 주제, 한 배우의 일생을 꿰뚫는 영화 리뷰가 뒤섞여 있다. 무겁지만 재밌고 어렵지만 이해가 간다. 그래서 에세이구나 싶기도 하다.
그의 삶을 다룬 부분은 연애인에 대한 일종의 관음증을 충족시켜 주기도 한다. 그의 솔직함이 있기에 더할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그러나 후반부의 영화 리뷰 나래비는 지리한 느낌도 준다. 겹치는 소재가 반복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분도 이해가 간다. 그가 말하지 않던가. '이제 다시 두번째 에세이를 펴냅니다. 지금은 절판된 첫번째 에세이의 글이 몇 개 남아 있고, 대개 그간 신문과 잡지에 연재했던 칼럼과 개인적인 글들입니다.(8p)'라고.
나는 이 책을 통해 허지웅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마녀사냥> 허지웅에서, 글쓰는 사람 허지웅으로. 책에서 그는 누차 강조한다. 버티자고. 나도 한번 그의 처세를 따라 볼까 한다. 끝으로 그의 처세의 끝, 이 책의 정수라 여겨지는 부분을 적어본다.
타인의 순수함과 절박함이 나보다 덜할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절대악과 절대선이 존재하는 세상을 상정하며 어느 한 편에서만 서면 명쾌해질 것이라 착각하지 말되,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문장을 한 가지씩 준비해놓고 끝까지 버팁시다.(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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