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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세상/영화

한국영화 <모비딕> 애달픈 기자를 말하다



모비딕 (2011)

7.2
감독
박인제
출연
황정민, 진구, 김민희, 김상호, 이경영
정보
드라마, 스릴러 | 한국 | 112 분 | 2011-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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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제목부터 마음에 든다. 사회부 기자의 이야기란다. 어디 한번 볼까? 지극히 협소한 몇 가지 사안을 경험하고 ‘비애감’이라는 단어로 모든 감정 상태를 표현하는 요즘, 어쩌면 ‘기자’를 다룬 영화가 나왔다는 것은 내게 일종의 위로였다. 기자를 알아간다는 설레임과 주인공들을 체스판의 ‘말’로 표현한 포스터의 음울함이 반어적으로 어울려, 나를 한껏 들뜨게 했다. 

 

발암교 폭발 후, 특종을 노리는 사회부 기자 이방우(황정민)에게 고향 후배 윤혁(진구)이 찾아온다. 혁이가 주고 간 가방 속에는 플로피 디스크와 알 수 없는 문서들이 가득하다.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기자들이 사건에 다가갈수록 드러나는 건 ‘정부 위의 정부’. 그들은 체스판 위의 말을 옮기듯 모든 사건, 사고들을 배후에서 조종한다.

 

<모비딕>의 주인공은 황정민도, 김상호도, 김민희도 아니다. 바로 ‘기자’다. 영화 속에는 “오보가 진실일 때도 있습니다”, “의심되는 인물 열 명을 파헤치는 것보다 선량한 시민 한 사람을 살리는 게 더 나아”, “너네 나 잘못 건드렸어! 다 파헤쳐서 잘근잘근 씹어줄거야!”와 같은 주옥같은 대사들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대사들을 포괄하는 성효관(김민희)의 말, “기자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가 있다. 기자가 되어 특정 사안을 ‘파다보면’ 종국에는 항상 정부, 기업, 조직과 같은 어떤 힘을 만나게 된다. 또, 그들을 ‘까다보면’ 다치는 건 기자고 밝혀지는 건 그들의 무지막지한 권력과 힘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감정들을 ‘비애감’이라고 표현해 왔다. 성효관의 말처럼 ‘기자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 라면서. 그러나 이방우는 달랐다. 그는 거대 장벽 앞에서 - 너무나 당연하지만 내게는 신선했던 - ‘우리 기자잖아!’라는 해법을 내놓는다. 기사로써 다수의 목숨을 살려낸 것이다.

 

영화에서 ‘기자’ 외에도 의미있게 다가오는 인물이 셋이 있다. 첫째는 윤혁이다. 그는 내부고발자다. 박정길의 서점에 위장 취업해 그의 죽음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한 윤혁은 죄책감으로 이방우를 찾게 된다. 그러나 열심히(?) 활동했던 모비딕에서 손을 털기까지의 과정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저 한 사람 죽였다’는 것에 괴로워할 만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런 단체에 들어가지도 않았을게다. 조금 더 마초적으로 악랄했다가 고발자가 됐다면 어땠을까? 두 번째는 신문사 부장이다. 이 분이 ‘기자’의 의미를 가장 함축하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미묘하게 표현되긴 했지만 마지막 부장의 미소는 ‘정부 위의 정부’를 잘근잘근 씹어가는 과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방우가 기사라는 이벤트를 저지를 수 있었고 오보가 됐을지라도 그 존재를 수면 위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마지막은 정부 위의 정부다. 여느 소설이나 영화가 그렇듯, 그들의 공간은 스카이라인이 한 눈에 들어오는 건물 꼭대기 층이다. 어쩜 공간 활용도가 그 모양인지 책상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 곳에는 모든 사건을 진두지휘하는 단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뻔한 설정은 차치하고 그 ‘정부 위의 정부’가 사건을 저지르는 일련의 과정들은 너무 추상적이다. <모비딕>에서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건 ‘보이지 않는 세력’이라고 들었다. 발암교보다는 핵 무기를, 검찰청장 보다는 대통령을 앉혀놓고 일을 도모했다면 그 세력의 막강함이 조금은 더 와닿았을 것이다. 전망 좋은 사무실에서 싸인만 하는 세력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

 

<모비딕> 개봉 후, 트위터에서 “기자로서 그 영화, 어땠어요?”라는 질문에 이런 트윗들이 연이어 올라왔었다. “그저 고맙습니다” “알아주니 좋던데요” 그렇다. 기자라는 직업은 사실(fact)에 기대 사람들이 알아야만 하는 혹은 알면 좋은 것들을 글로써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알아야 하거나 알면 좋은 것들’은 보통 어떤 세력들의 이익과 닿아있기 마련이고, 그것들을 밝혀내기엔 비호라는 철옹성이 겹겹이 쌓여있어 접근조차 힘들다. 하지만 기자들은 밝혀낸 어떤 사실이 이 세상을 조금은 ‘살만한’ 곳으로 만든다는 믿음으로 파헤치고 다치고 깨진다. 그리고 그렇게 알아낸 사실들을 매일 발행되는 신문의 한 지면을 '글'로 채워나간다.

 

<모비딕>은 기자들 대답처럼 참 고마운 영화다. ‘기자’라는 직업에 접근하려 노력했고 ‘정부 위의 정부’를 알아내려고 애썼다. 황정민과 김상호는 역시 연기 잘하는 영화인이었고 김민희는 생각보다 기자가 잘 어울렸다. 희한하게 내 생각과 많이 닿아있어서 더 절절하게 공감했던 영화 <모비딕>, 이 참에 허먼 멜빌의 고래 이야기, 소설 <모비딕>에 빠져봐야 겠다.


- 2011년 6월 18일 21:05




"왜 기자 생활 그만뒀어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영화다.

정부 위의 정부, 기자 위의 정부, 진실 위의 정부.

사건을 팔수록 짙어지는 비애감.

지금의 대한민국은 변했을까?


- 2014년 8월 24일 1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