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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공부/100일 글쓰기

[70일][7월26일] 사려니숲길





사려니숲길





                  <사려니숲길>  

                                       - 도종환 - 

  어제도 사막 모래 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 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 리 십 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것들을 주체하기 어려운 날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쏟아진 빗줄기가 순식간에 천미천 같은 개울을 이루고
  우리도 환호작약하며 물줄기를 따라가는 길
  나도 그대도 단풍드는 날 오리라는 걸
  받아들이게 하는 가을 서어나무 길
  길을 끊어놓은 폭설
  오늘 하루의 속도를 늦추게 해준 걸
  고맙게 받아들인 삼나무 숲길
  문득 짐을 싸서 그곳으로 가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라산 중산간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사려니는 '살안이' 혹은 '솔안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에 쓰이는 '살' 혹은 '솔'은 신성한 곳 또는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신역(神域)의 산명(山名)에 쓰이는 말이다. 즉 사려니는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 사려니숲에 당도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사려니'의 의미다.


13년 8월 무더운 여름, 제주도를 찾았다. 회사에는 ‘집에 일이 있습니다.’, 집에는 ‘대학 동기들과 휴가 갑니다.’라는 말로 모두를 속이고(?) - 당시의 남자친구였던 - 신랑과 단둘이 떠난 제주도 여행이었다. 지지부진한 업무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결혼 준비에 온전히 지쳐 있던 우리만의 일탈이었다.


시작은 호기로웠다. 하지만 날씨가 궂었다. 숙소에 있을 때 그렇게 쾌청하던 날씨가 외출만하면 변덕을 부렸다. 비오고 천둥치는 날씨는 저녁 6시를 기점으로 가게들이 거의 문을 닫는 제주도민들의 생활과 어울려 우리를 더 고되게 했다. 그러다 찾은 곳이 사려니 숲길이었다. ‘비온 후’ ‘아침에’ 방문하면 제격이라는 소개 글을 보고 ‘여기다!!’ 싶었다. 여행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깨끗했다. 맑았다. 들숨에 따라오는 상쾌한 공기는 몸을 정화시켰다. 전날의 비로 질척이는 땅은 매 걸음마다 새소리, 물소리와 어울리는 화음을 만들었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거미줄마저 생명의 신비를 보여주는 듯 했다. 안개와 구름이 가지마다 걸려있었고 삼나무들은 끝을 볼 수 없을 만큼 삐죽 솟아있었다.


우리만의 무릉도원이었다. 겸허했고 진중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편안하게 이야기했다. 촛불 앞에서, 술 한 잔을 걸치고 하는 그 어떤 이야기들보다 진솔했다. 당시의 어려움이 무엇 때문인지 생각을 나눴고 앞길이 막막하던 문제들의 실마리를 함께 고민하기로 했다. 결국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게 행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는 서로 붙잡고 울면서 앞으로의 시간을 약속했다. 눈은 울고 있었는데 마음은 행복했다.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서울로 돌아왔다. 생활이 시작됐고 무찔러 나가자던 문제들이 다시 피부로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극복했다. 결국 지금의 우리를 이루었다. 나는 가끔씩 당시의 제주도 여행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 중 사려니숲길 사진을 자주 본다. 사려니는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그 신성함이 우리를 영적으로 평온하게 해주지 않았나싶다. 아마 지금 만끽하고 있는 행복한 시간들도 그 숲의 좋은 기운이 지속되기 때문이리라 믿는다.


(원고지 12.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