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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공부/100일 글쓰기

[68일][7월24일] 나의 글쓰기를 알아가는 길


나의 글쓰기를 알아가는 길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고 있다. 글쓰기를 말하는데 저릿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왜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던가? 글이란 나에게 무엇인가? 무언가를 쓴다지만 글쓰기의 언저리만 더듬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내게, 이 책이 답을 줄지도 모르겠다.

 

내가 글쓰기를 언제, 어떻게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허나 내가 언제 가장 글을 많이 정말 많이 쓰는 작가와 같은 사람들에 비하면 한없이 적지만 썼는지는 기억한다. 기자 생활을 할 때다. 그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노숙자기획기사와 어묵볶음이다.

 

노숙자 르포를 맡았다. ‘길에서 알아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정도로 인식됐던 그들 삶에는 그 어떤 사회보다 명확한 질서가 있었다. 대장이 있었고, 대장의 여자, 대장의 오른팔, 왼팔, 행동대장 등이 있었다. 기억에 확실히 각인된 사람은 그 서열 안의 가장 말단으로 보이는 A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재산 분쟁이 생기면서 거리로 나왔다고 했다. 술이 들어가면서 말문을 트기 시작한 그는 속에 품었던 간식거리, 어묵당근볶음을 내 앞에 내놓았다. 바지춤에서 이쑤시개를 하나 꺼내 어묵을 찍어 내밀기도 했다. 맛을 한 번 보라는 신호였다. 나는 망설였다. 결국 맛을 보지는 못했다. 그에게 어묵은 친밀함의 표현, 내게는 지저분한 노숙자의 것이었을 터. 사실 그 어묵은 먹을 수 있는 정상상태의 음식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음식이 누군가로부터 왔는지 해석했고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하여 서울역을 지날 때마다 나는 어묵의 불편함과 내 선택에 대한 자책감에 시달린다.

<글쓰기의 최전선>을 쓴 은유 작가는 성폭력피해여성들과 진행했던 글쓰기 수업을 이야기한다. 같은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리고 글쓰기는 가르칠 수 없더라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기다리고 들어줄 수 있다는 답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노숙자가 이야기를 하려는 찰나 등을 보인 건 아닐까. 그래서인지 그 때 그 노숙자 기사는 까이고 까이기를 반복하다 결국 신문 지면에 오르지 못했다.

 

글을 쓰는 건 무슨 이야기를 하든 기다리고 들어주겠다는 마음과 어쩌면 동일선상에 있는지 모르겠다. 내 안에서 무엇이, 어떤 식으로 쏟아져 나오더라도 배설해내겠다는 각오가 필요한 어떤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노숙자의 어묵볶음일지도 말이다. 지저분한 비닐에 쌓여 있지만 열어보면 갓 구운 빵 일수도, 꽃봉오리인 줄 알았는데 그 안에 똥 묻은 파리가 득실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 낱낱이 뱉어내고 표현해야 알 수 있다는 것, 그것만이 글을 쓰겠다는 자로서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 아닐까.

 

나는 아직 을 말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지금 읽고 있는 <글쓰기의 최전선>이 그 부족함을 조금 고쳐나가도록 길을 알려주기를 기대해본다.


 

(원고지 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