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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공부/100일 글쓰기

[63일][7월19일] <케빈에 대하여> '엄마'라는 이름



소설과 영화,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엄마'라는 이름

 


엄마의 미덕은 희생이나 고귀함으로 곧 잘 표현된다. 하여 엄마라는 단어에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움켜쥐고 눈물을 쏟는다. 그러나 엄마는 열 달을 품었던 자식이,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본인의 이름을 잃고 '누군가의 엄마'로 불리면서 말이다.

케빈은 특별하다. 잘 웃지 않는다.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에바는 케빈이 언어장애를 가졌는지 걱정하며 병원에 간다. 에바는 의사에게 아이를 환자 취급하는 못된 엄마로 비난받는다. 어느 날, 살뜰하게 가꾼 에바의 방을 케빈이 붉은색 페인트로 칠해놓는다. 허탈함에 정신을 놓은 에바를 두고 남편은 아이를 잘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자신의 기저귀를 마땅히 갈아야 할 에바의 위치를 파악한 케빈은 새 기저귀에 일을 보고, 또 일을 보고, 또 일을 보기를 반복한다. 에바는 기저귀를 갈고, 또 기저귀를 갈고, 또 기저귀를 간다. 에바는 케빈을 이해하려 끊임없이 노력하고 인내한다. 그 이유는, 케빈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첫 장면에서 에바는 토마토 축제를 만끽하고 있다. 새빨간 토마토들과 토마토를 뒤집어 쓴 사람들에 둘러 쌓여 한없이 붉게 물든 에바의 모습은, 훗날 케빈의 엄마가 되어 짊어져야 할 고통과 닮았다. 여행사를 이끌며 완벽함을 꿈꾸던 젊은 여성 갓챠두리안, 케빈과 똑같은 이름의 케빈 엄마로 살아가야하는 에바. 에바는 케빈의 가족 중 유일하게 물리적 상처를 입지 않았지만, '엄마'라는 멍에를 평생 지고 가야한다. 그래서 더 붉고 아픈 상처를 지녔다.


<케빈에 대하여>를 읽고 많은 사람들이 아이 성장에 미치는 엄마의 존재를 생각한다. 그러나 난, 엄마가 되어야 하는 여성들의 숙명을 더 무겁게 느꼈다. 작가도 '엄마'라는 이름이 주는 - 아이들에 대한 무조건적 방패가 되어야 하는 - 책임과 의무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원작의 제목이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아니었을까. 케빈보다는, 케빈으로 인해 응어리진 가슴을 지니고 살아야하는, 에바를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소개하던 한 DJ"무서운 장면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 너무 무서웠어요."라고 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생물학적 여자로서, 누군가의 엄마가 된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로서, 여성으로서,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걸까.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이 있는걸까.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무섭지만 피할 수 없는 이야기다.

 


(원고지 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