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오피니언(2015.03.19.)
원문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18/2015031804208.html
[강경희 칼럼] 수술대에 올릴 건 ‘수능 영어’가 아니라 ‘교육부’
- 동생 업고 피란 간 덕수처럼 ‘21세기 덕수’는 문제집 업고 고달프게 달린다.
- ‘일자리 3차 대전’ 勝負(승부)는 우주로 날겠다는 무모한 기업가 정신서 갈린다는데
관객 1400만명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을 보며 제일 인상 깊었던 순간은 어린 덕수가 여동생 막순이의 손을 잡고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향해 달리는 흥남 철수 장면이었다. 배에 오르다 등에 업은 동생을 놓치고, 동생을 찾아나선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느라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되는 처절한 삶의 분기점이었다.
엊그제 교육부가 발표한 수능 개편안 시안을 보며 엉뚱하게도 흥남 부둣가의 어린 덕수 모습이 겹쳤다. 이 황당한 시험을 향해 10대 시절을 터널 속 지나듯 보내는 아이들, 터널 벗어나면 서광이라고 기대했는데 더 가파른 고용 벼랑이 기다리는 20대의 현실…. ‘피란길에 목숨이 오락가락했던 덕수에 비할 바가 되나. 부모가 벌어오는 돈으로 따스운 밥 먹고 책상머리에서 공부만 하면 되는 놈들이 복에 겨워 배부른 푸념’이라고 혀를 찰 덕수 세대도 꽤 있겠지만 전시도 아니고, 보릿고개도 넘은 시대에 되레 대한민국 아이들과 젊은이 상당수는 ‘20세기형 덕수’로 살아간다. 등에는 여동생 대신 참고서와 문제집을 업은 채 목표 지점은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아닌 대학 입시와 그 너머의 몇 안 되는 정규직을 향해.
세계적 요론조사 기관인 갤럽의 짐 클리프턴 회장은 저서 ‘일자리 전쟁’에서 다가오는 ‘3차 대전’은 양질의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글로벌 전면전이라고 했다. 지구상 70억 인구 중 일하고 싶거나 일하는 인구는 30억명인데 양질의 일자리는 12억개뿐이라서 18억개가 부족 내지는 미흡 상태다. ‘전쟁’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처절한 구직 대열은 우리 청년들한테도 익숙한 현실이다. 통계청이 어제 발표한 올 2월 청년 실업률은 11.1%로 IMF 외환 위기 이후 최악이었다.
수능 치르는 10대가 60여만명이고, 열 중 일고여덜은 대학에 들어가 대학 졸업자 수는 연 50만명에 이른다. 그 후 코스가 뻔하다. 삼성그룹 공채에 응시하는 인원만 한 번에 10만명 넘고, 5/7/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 젊은이도 연간 20만명이 넘는다. 이런 구직 대열에 선 청춘들이 피란 행렬에서 죽기 살기로 달리던 덕수 할아버지보다 월등 편하고 행복해졌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사교육은 이런 현실이 빚어낸 고열 증세 같은 것인데 교육 당국은 안이하게도 수능 방식만 바꾸면 고열도 사라질 것이라며 오랫동안 임시 요법에만 매달려왔다. 엊그제 발표한 수능 개편안도 마찬가지다. 영어 사교육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니, 교육부는 EBS 교재에서 문제를 70% 그대로 내면 쉽게 공부하고 사교육에 돈 안 써도 된다는 정책을 수년째 고수해왔다. 그 바람에 수능 영어는 EBS 교재에서 한글 해석만 읽고도 문제 풀이가 가능한 시험, 하나 틀리면 등급이 뚝 떨어지는 시험으로 변질됐다. 교육부가 엊그제 낸 개선한 골자는 “EBS 교재에서 70% 똑같이는 말고, 70% 엇비슷하게 내겠다”는 것이었다. 출제 방식을 바꾼다고 전쟁터가 꽃밭 되는 건 아니라는 걸 뻔히 아는 수험생들의 반응은 이랬다. “우리가 실험실 쥐냐. 매번 바꾸지 말고, 제발 좀 그냥이라도 놔둬라!”
일자리를 향한 경쟁이 이리 치열하게 어린 나이부터 시작되는 건 일자리를 펑펑 만들어내지 못하고 바퀴가 점점 느려지는 우리 경제 체질 탓이고, 그 틈바구니에서 ‘먹고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라는 걸 절감하는 부모 세대의 불안이 자식한테 이식된 탓도 있지만 ‘일자리 창출형 교육’으로 거듭나지 못한 채 20세기 성공담에만 머물러 있는 한국 교육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갤럽 회장이 ‘3차 대전’에 비견한 일자리 전쟁에서 승자가 되는 길은 쉽고도 어렵다. 일자리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존재는 기업가요, 사회 전체가 기업가 에너지를 팍팍 올려야 하는데 그 씨앗은 초‧중‧고등학교에서부터 잉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야 할 게 딱 배 한 척뿐이라면 죽기 살기로 다들 뛰어갈 게 아니라 친구들을 몽땅 태울 우주선이나 우주선 회사를 만들겠다는 배짱과 자신감을 키워주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 사회의 기업가 에너지를 예측하기 위해 갤럽은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잠재력을 측정해볼 ‘희망 지수’리스트도 만들었는데 항목들이 이렇다.
‘나는 내 사업을 할 계획이다. 세계를 변화시킬 무엇인가를 발명하겠다. 실패할지라도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장이 되고 싶다. 학교에서 돈과 금융에 대해 교육하고 있다. 학교에서 창업 및 경영 수업을 하고 있다….’
이 잣대를 들이대 기업가 정신이 학생들 사이에서 상승 추세라면 일자리도 늘어나는 사회가 되고, 하락 추세라면 그 사회의 미래는 그저 운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교육 정책에서 수술대 위에 올라야 할 게 흠 많은 ‘수능 영어’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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