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색된 책 나눔
드디어 <토지>를 구입했다. 소설을 마구 읽어대면서부터 살까 말까를 고민했었다. 다음 달 부터 시작하는 토지 읽기에도 참여하기로 했다. 민족대서사시와 우리나라 언어의 아름다움에 한껏 취할 생각을 하니 벌써 기대가 된다.
토지 전권 세트가 도착 하자마자 책장을 정리했다. 이런 귀한 책을 바닥에 팽겨쳐 둘 수는 없는 법. 알짜배기 자리에 토지를 넣었다. 이는 자연스레 책장 정리로 이어졌다. 열두 번도 넘게 본 책, 한번 본 책, 읽다만 책, 읽지도 않은 책, 선물 받은 책, 여러 종류의 책들이 나란히 나란히 서 있었다.
이왕 정리하는 거 제대로 하자 싶어 평생 꽂혀있기만 할 것 같은 책들을 모았다. 지인들에게 ‘나눔’을 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들이 학교 후배들이다. 우리 집에만 오면 이곳을 본인의 개인 도서관으로 하겠다며 가득한 책들을 항상 부러워했다. 그 녀석들이 ‘책 나눔’을 알 수 있도록 SNS에 글과 사진을 올렸다. “필요한 분 나눠드립니다, 선착순!!”
글을 올리기가 무섭게 덧글이 달렸다. 나는 여러 번 놀랐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교류가 없는 사람들이 가장 빠르게 신청한다는 했다는 것에 놀라고, 그런 사람들일수록 무작정 여러 권을 신청하고 본다는 데 놀랐다.
이런 덧글이 있었다. “나는 역사를 좋아하니까 책 A, B, C 요즘에는 글쓰기에 관심이 많으니까 책 D, E, F, G, 우리부모님이 좋아하실 것 같으니까 H, I, J, K, L, M 총 13권 신청. 거기서 신청 못 받은 책은 그냥 제게 다 몰빵. 그리고 나누는 거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택배비도 보내는 사람이 부담하는 거죠?”
예전 직장에서 업무상 잠깐 말을 섞었던 옆 부서 사람이었다. 그녀와 연락이 끊긴 건 무려 5년 전이었다. 이 사람이 나의 SNS를 보고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더 나아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배송비’까지 고려하는 사려깊음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내 손 떼가 묻은 책을 준다는 건 ‘기억’을 선물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런데 그 사람의 덧글을 보니 그저 ‘공짜’가 좋아 이벤트에 참여하는 느낌이었다. 뭔가 억울하고 주기 싫은 기분이었다.
5년 전에 한번 연락하고 말았던 그녀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오늘 내게 손수 연락을 해왔다. 자신이 책 받을 주소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덧글 밑으로는 후배들이 ‘선착순에서 밀려 아쉽다’며 우는 글을 여럿 남겼다. 좋은 일 하려다가 오히려 된통 당한 느낌이다. 그냥 줘버릴까? 여러 사람한테 임의대로 나눠서 줄까? 아무도 주지 말고 그냥 내가 다 가져버릴까? 5년 만에 연락한 한 여인으로 인해 나의 책 ‘나눔’이 엉망이 됐다. 고민스러운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이다.
(원고지 8.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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