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멘탈 인간의 고백
<지하에서 쓴 수기> 리뷰
팀장이 있다. 어떤 한 사물에 대한 역사, 쓰임, 관련 정보를 쉼없이 뽑아내는 인간 백과사전이다. 정보통신관련 법전문가이기도 하다. 반면, 팀원들에게는 ‘알아서 하세요.’라는 방임의 태도를 취한다. 윗사람들에게는 ‘네, 그렇게 하시죠.’라는 무조건적 복종을 일삼는다. 서로 편하자는 게 그의 이유다. 그런 그를 두고 우리는 ‘유리멘탈’이라 부른다.
여기 또 한명의 유리멘탈이 있다. <지하에서 쓴 수기>의 주인공, 19세기 러시아 문호이자 사상가로 유명한 도스토옙스키다. 모스크바 빈민병원의 군의관 둘째 아들로 태어나 공병사관학교를 다니기도 하지만 후에는 문학에 집중한다. 이후 사회주의 운동과 관련된 모임에 출입하면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여년 간 감옥 생활을 한다.
제목의 ‘지하’는 그의 감옥 생활을 암시하는 걸까? 실상은 달랐다. ‘지하’는 작가가 설정한 ‘일반적의 사고와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줄곧 이를 비난한다. 더 나아가 그렇게 생각해왔던 자신을 변명한다. 이면에는 ‘지금의 나는 고귀하고 저들과 다르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수기를 쓰던 당시, 그 전의 자신의 생이 별로 ‘멋스럽지 않았다’는 자조가 섞여있는 듯하다.
그는 연신 청자(혹은 독자)를 설득한다. ‘여러분’ 또는 ‘신사’라며 누군가를 지칭한다. 하지만 그가 뱉어내는 날 것의 표현들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하나의 문제를 두고 ‘이렇게 생각하지? - 네가 그렇게 여기리라 확신해 - 하지만 나는 달라’라는 식이다. 1부 <지하>에서 이를 정신없게 풀어내고 있다.
2부 <젖은 눈에 얽힌 이야기>에서는 그의 태도를 조금 더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장교에 대해 분노를 가지고 복수를 결심한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장교가 다니는 파티나 길목을 외우고, 수 만 가지의 복수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 하지만 이마저도 생각에 그친다. 몇 년이 지난 후, 자신이 생각한 복수의 방법 중 하나였던 길가에서 어깨치기를 시도한다. 나아가 성공했다며 행복해한다. 장교는 그를 실존적 인물로,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었던 인물로 저자를 이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몇 년 동안 장교에 대한 복수를 꿈꿨고 이를 실천해, 스스로 뿌듯해한다. 어디 이뿐이랴. 부르지 않는 동창들의 모임에 가고, 그들에게 복수를 꿈꾸지만 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 분노를 사창가 여인에게 모욕적인 말로 대신하곤, 그녀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해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치졸하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악령>, <백치> 등 대작을 쏟아낸 거장의 작품이다. <지하에서의 수기>가 나는 어려웠다. 오랜 시간 품어온 걸 쏟아내는 듯한 태도와 변덕을 부리는 복잡한 사고의 흐름이 불편했다. 하지만 그가 위약한 정신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세상을 비웃는 것 같지만 자신을 제일 혐오한다는 점이 그렇고, 지하세상에 갇혀 있는 듯 하지만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가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도스토옙스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근저를 조금 살펴본 기분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진다.
(원고지 18.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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